
어린이집에서 친구가 장난감을 빼앗아도 아무 말 못 하고 돌아서는 아이를 보신 적 있으신가요? 저는 바로 그게 제 아이였습니다. 집에서는 말도 많고 장난도 잘 치는 아이가 밖에만 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닫아버렸습니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집에 와서야 울며 털어놓는 모습이 반복되었고 처음에는 그냥 소심한 성격이려니 넘겼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감정언어화, 표현의 출발점은 말이 아닌 감정 인식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좀 크게 말해, 싫으면 싫다고 해야지를 반복했습니다. 돌아보면 정말 잘못된 접근이었습니다. 아이는 표현을 못하는 게 아니라 표현하는 방법을 아직 배우지 못한 상태였거든요. 자기 표현력은 말하기 기술보다 감정언어화 능력에서 시작됩니다. 감정언어화란 자신이 느끼는 감정 상태를 언어로 정확하게 인식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지금 내가 속상한지 억울한지 부끄러운지를 먼저 알아야 말로 전달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방향을 바꾼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였습니다. 아이가 뭔가 힘들어 보일 때 왜 말을 못 해? 대신 속상했구나, 기다리기 싫어서 답답했겠다고 감정을 먼저 말로 표현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쌓이면 아이는 자신의 마음속 상태를 인식하는 능력 즉 정서인식 능력을 키우게 됩니다.
정서인식 능력이란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알아채고 이해하는 능력으로 이후 의사소통과 사회성 발달의 기반이 됩니다. 실제로 육아정책연구소의 연구에서도 부모가 감정을 언어로 반영해 주는 방식이 아동의 언어표현력 발달과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음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감정을 아는 아이가 표현도 쉽게 하게 된다는 걸 직접 겪어보니 확실히 알겠더라고요.
말을 빨리 잘하게 만드는 것보다 아이가 자기 마음을 먼저 인식하게 돕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습니다. 자기표현력 발달을 가로막는 주요 원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틀릴까 봐 두려워하는 경험이 쌓인 경우 (혼나거나 웃음거리가 된 기억)
- 부모가 아이 마음을 미리 읽고 대신 말해주는 환경
- 감정 어휘 자체를 배우지 못해 답답함만 커진 경우
- 신중한 기질로 인해 말하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한 경우
이 중 저희 아이에게 해당했던 건 두 번째였습니다. 제가 너무 빨리 읽고 대신 설명해주는 바람에 아이가 스스로 표현할 기회를 놓치고 있었던 거였습니다.
자기주장훈련과 표현환경, 집에서 만들 수 있습니다
표현력이 자라는 데는 자기주장훈련이 필요합니다. 자기주장훈련이란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타인에게 솔직하게 전달하되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건강하게 표현하는 능력을 기르는 연습을 말합니다. 어른들도 쉽지 않은 이 능력을 아이에게 키워주려면 일상 속에서 작은 연습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제가 가장 효과를 본 방법은 선택권 주기였습니다. 오늘 어떤 옷을 입을지 사과를 먹을지 바나나를 먹을지 책을 먼저 읽을지 블록을 먼저 할지를 매일 물어봤습니다. 정답이 없는 이런 선택들이 아이에게 내 의견을 말해도 된다는 감각을 서서히 심어줬습니다. 역할극도 꽤 도움이 됐습니다. 역할극이란 특정 상황을 설정하고 각자 역할을 맡아 대화를 연습하는 활동입니다. 친구가 장난감을 빼앗는 상황을 설정해두고 하지 마, 지금은 내 차례야 같은 표현을 함께 연습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던 아이가 몇 주 지나자 또렷하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의 변화였습니다. 표현환경도 중요합니다. 표현환경이란 아이가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도록 심리적 안전감이 보장된 상황과 분위기를 말합니다.
아이가 말을 시작했을 때 중간에 끊거나 바로 판단을 내리면 아이는 다시 입을 닫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정말 조심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건 네 잘못이야보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더 말해줄래?로 반응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아이가 이야기를 풀어놓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아이는 자신의 목소리가 존중받는다는 걸 느낄 때 비로소 더 많이 표현하려 합니다. 한국아동발달학회의 연구에서도 부모의 적극적 경청과 공감적 반응이 아동의 자기 개방 수준을 유의미하게 높인다는 결과가 발표된 바 있습니다.
자기 개방이란 자신의 생각, 감정, 경험을 타인에게 솔직하게 드러내는 행동을 뜻합니다. 한 가지 더 짚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을 많이 하는 아이가 표현력이 좋다고 여기는 시선이 있는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조용한 아이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충분히 깊이 있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이의 성격을 바꾸려 하기보다 그 아이에게 맞는 표현의 통로를 찾아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습니다.
결국 자기표현력은 타고난 기질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표현의 경험을 안전한 환경 속에서 반복했느냐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직접 겪어보며 느꼈습니다. 말이 크고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작은 목소리라도 자신의 마음을 꺼낼 수 있다면 그게 이미 충분히 중요한 힘입니다. 부모가 아이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순간부터 아이도 자신의 마음을 존중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저녁 아이에게 선택 하나, 감정 한 문장을 물어보는 것부터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